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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이낙스라고 하면 여러분이 잘 알고계시는 『신세계 에반게리온』이나 『신비한 바다의 나디아』 『톱을 노려라!』등, 수많은 사회현상을 일으킨 애니메이션을 제작한 영상제작 프로덕션이지요. 애당초 가이낙스는 어째서 탄생한 것일까?


실은 이제껏 어느 매체에도 게재되지 않았던 「진짜 설립 이유」가 있는 모양입니다…


오카다:가이낙스에 대한 일로 말이지, 이제까지 쓰지 못했던 게 있거든. 그게 뭐냐면, 가이낙스 성립에 대한 이야기.


가이낙스 하면, 전해지는 얘기로도, 내가 이제까지 쓴 문장으로도, 오사카에 상당히 우수한 녀석이 모여서 애니메이션을 만들자고 생각했다, 그래서 도쿄에 가서 했다는, 성공적인, 뭐랄까 정통파 석세스 스토리로 쓰고들 있죠.


그렇지만, 실제로는 다이콘 필름에서 시작해 제너럴 프로덕트가 된 제가 하던 회사, 그리고 거기서 가이낙스가 된 경위는, 그렇게 아름다운 이야기만도 아니에요.


가이낙스의 직접적인 스타트 원인이 뭔가 하면은, 이걸 어떻게 말해야 할까, 내 인망이 없었다고 해야 할까…그런 거거든.


그게 뭐였나면은 말이죠, 우선 스태프의 요구를 제대로 내가 헤아릴 수 없었단 이유도 있었고, 그리고 안노(히데아키) 군이 얼마나 『돌아온 울트라맨』이란 8미리 특촬영화에 사활을 다했는지 알고 있으면서도, 스케줄대로 진행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안노 군을 감독 자리에서 강판시켰다던 지하는. 여러 이유가 있었어.


그렇지만, 나 스스로도, 이게 최대의 이유였었지 싶은 것은, 뭐랄까, 그 당시에…여기서부터는 정말로 아무도 들은 적 없는 이야기라서, 이것참~


그 당시에, 내가 있지, 같이 SF대회나 스태프를 하던 아이랑 뭐 사귀고 있었다고 할까, 결혼까지 했었는데 바람을 피워버렸거든.


그래서 그 아이가 「저는 앞으로 어떻게 되나요. 오카다 씨는 부인도 있는데…」 이렇게 말해서 내가 「진정해 진정해」 이런 식으로, 그 상황만 모면해 왔거든.


(시청 코멘트를 보고서)「에에에에에」나 「최악이다w」……맞아 쓰레깁니다. 네, 죄송해요.


최악이니까 지금까지 말 못했던 거고, 하고 싶지도 않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지. 내 인의를 관철하는 수밖에는(웃음). 그래서 그 아이가 다른 스태프한테 상담을 해서 들키고, 나는 완전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규탄 당했어. 그런 짓을 해도 된다고 생각했냐, 는 말도 있었고 더는 너랑은 같이 못하겠다는 식의 말도 들어서. 내가 그 때 생각했던 게…


(시청자 코멘트를 보고서)「그런 녀석이라곤 생각도 못했다」「토시오한테 실망했다」 미안해(웃음) 「딸이 보고 있냐」 보고 있지 않다고 생각하지만 머지않아 보게 될 거라 생각해. 나도 말이지, 딸이 십년은 (나랑) 말 안 할 걸 각오하고서 말하는 거지만. 그래서 그 때는 말이지, 나 더는 오사카에는 있을 수 없겠구나 하고 생각한 건 사실이거든.


그게 말이지, 가이낙스 스타트의, 나에게 있어서 가장 큰 계기였어. 즉 지금까지 내 친척, 가족 이상의 존재였고, 평생 함께 해내갈 거라 생각했던 사람들 전원에게서 「널 경멸한다」「너 같은 놈이랑 같이 일할 수 없다」란 말을 듣고서, 반성하고 머리를 숙이며 「한 번 더 해주세요」라고 말할 만한 귀염성도 나한테는 없었던 거지.


그럴 게 아니라, 그럼 오사카에 있을 수 없으면 어떻게 해야 할까를 생각했어.


그 때, 비슷한 생각을 했던 것이 『오네아미스의 날개』의 감독인 야마가 히로유키 군이였고, 야마가는 야마가대로 「이대로 오사카에서 행복하게 있을까보냐」 생각했었어.


왜냐면 안노나 아카이는 그럭저럭 오사카에서 행복했었거든.


안노는 『돌아온 울트라맨』 도중에 감독에서 강판 당하긴 했어도 마지막까지 만들고, 다음은 뭘 만들까 생각하고 있었고.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같은 걸로 호출 받아 이따금씩 도쿄에 가서 애니메이터 작업을 하고, 다시 오사카에 돌아와 자주영화를 만드는, 굉장히 좋은 밸런스로 살았거든.


말하자면, 하카타를 본거지로 삼고 도쿄에 가서 돈을 버는 하카타 하나마루・다이키치(※개그맨) 같은 포지션이었지.


그리고 아카이 군은 아카이 군대로 특촬영화를 하고 싶어 했으니까, 그렇지만 도쿄에 가서 특촬영화를 한다고 말했더니 거대한 스튜디오 시스템 같은 영화업계 중 제일 아래에 들어가서 뭘 할 수 있겠냐고 했었지.


아메미야 케이타가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카와자키 미노루가 어떤 상황에 처했는지를 생각하면, 그런 곳에는 가고 싶지 않다는 식으로 아카이 군은 말했어.


역시 오사카에서 자주영화, 8미리를 했으니까 다음은 16미리, 그 다음은 35미리란 식으로 점점 스케일 업을 한다――아카이 군은 그런 의미로는 굉장한 전략가인 동시에 견실한 사람이니까, 그런 식으로 생각했어.


하지만 오직 야마가만, 이대로 오사카의 시골에서 자주영화로 굉장히 유명한 녀석이 되는 걸로 끝나는 건 싫다고 했지.


하지만, 이제 이 집단은 여기서 만족해버릴 대목에, 생각지도 못하게, 나한테 스캔들이 일어난 거지.


그래서 나는 나대로 「더는 오사카에는 못 있겠구나」라고 생각했고, 야마가 쪽은 야마가 대로 「오카다 씨, 오사카에 못 있겠으면 도쿄에 가죠」라고(웃음)


나는 그 당시, 야마가랑 같이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걸, 뭐랄까, 거의 도망치는 걸로 생각했었지.


하지만, 그래……백에 1이 아니야, 4대1, 3대1이나, 25퍼센트 정도의 승산은 있다고 보였어.


현재의 애니메이션 업계나, 우리가 지닌 것이나, 그리고 오사카에서 모든 신뢰를 잃었다곤 해도, 현재 내가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이나 영향력을 생각하고, 도쿄에 가서, 엄청 일해서, 엄청 대단한 사장이 되고, 굉장히 좋은 프로듀서가 된다면…성공률 25퍼센트일까, 약간 더 올라가지 않을까, 하고.


야마가는 야마가대로 「성공률이 설령 10퍼센트라도 나는 이제 갈 수 밖에 없다」고 말해줬어.


그럼 갈까 답하고, 오사카의 제네프로…였었지, 를 전부 버리고 갔었어. 그러니 당시의, 지금의 가이낙스를 이루는, 나랑 야마가 이외의 전원이지, 거의 전원이 가이낙스란 회사가 생길 거라곤 아무도 믿지 않았어.


나랑 야마가만 믿었어, 그보다는 야마가는 「성공 못하면 곤란하다」고 했고,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성공 못하면 돌아갈 곳이 없다」는 상황으로 도쿄에 가서, 고작 둘이서 시작한 거야.


그래서 좀처럼, 가이낙스가 커진 이후로도 오사카에서 사람을 부르지 못하지. 그렇게까지는 자신이 없었거든.


뭐랄까, S다 씨가 말이야 「아무도 모르는 가이낙스」라고 쓰고, 가이낙스가 어떻게 탄생했는지를 말해주세요라고 한다면, 나는 이 이야기를 할 수 밖에 없어.


그게, 이 이야기를 안 하면, 오사카에 단순히 굉장히 재능이 있는 사람들이 모여서 노력했습니다, 운도 따랐고 재능도 있었고 좋은 시대였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되어 버리잖아.


그렇지만 말이지, 오사카에 그 무렵 있던 것은, 나만해도…그 최악의 나만 해도, 야마가도, 안노도, 아마도, 이 방송을 보고 있는 너희들과 그리 다르지 않을 거야. 그렇게 다르지 않는 녀석들이 팍하고 시작해서, 이제부터 애니메이션을 만들자, 하고.


반다이에 프레젠테이션을 해서 3억엔이나 4억엔의 극장영화를 만들거라 말해도, 그 누구도 믿어주지 않았었지. 그러니까, 그다지 영웅담처럼 생각하지는 말아줬으면 하는 마음은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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