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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2.10.11 가이낙스가 탄생한 진짜 이유 2
  2. 2012.09.28 아무도 모르는 가이낙스 3

http://news.nicovideo.jp/watch/nw393217




가이낙스라고 하면 여러분이 잘 알고계시는 『신세계 에반게리온』이나 『신비한 바다의 나디아』 『톱을 노려라!』등, 수많은 사회현상을 일으킨 애니메이션을 제작한 영상제작 프로덕션이지요. 애당초 가이낙스는 어째서 탄생한 것일까?


실은 이제껏 어느 매체에도 게재되지 않았던 「진짜 설립 이유」가 있는 모양입니다…


오카다:가이낙스에 대한 일로 말이지, 이제까지 쓰지 못했던 게 있거든. 그게 뭐냐면, 가이낙스 성립에 대한 이야기.


가이낙스 하면, 전해지는 얘기로도, 내가 이제까지 쓴 문장으로도, 오사카에 상당히 우수한 녀석이 모여서 애니메이션을 만들자고 생각했다, 그래서 도쿄에 가서 했다는, 성공적인, 뭐랄까 정통파 석세스 스토리로 쓰고들 있죠.


그렇지만, 실제로는 다이콘 필름에서 시작해 제너럴 프로덕트가 된 제가 하던 회사, 그리고 거기서 가이낙스가 된 경위는, 그렇게 아름다운 이야기만도 아니에요.


가이낙스의 직접적인 스타트 원인이 뭔가 하면은, 이걸 어떻게 말해야 할까, 내 인망이 없었다고 해야 할까…그런 거거든.


그게 뭐였나면은 말이죠, 우선 스태프의 요구를 제대로 내가 헤아릴 수 없었단 이유도 있었고, 그리고 안노(히데아키) 군이 얼마나 『돌아온 울트라맨』이란 8미리 특촬영화에 사활을 다했는지 알고 있으면서도, 스케줄대로 진행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안노 군을 감독 자리에서 강판시켰다던 지하는. 여러 이유가 있었어.


그렇지만, 나 스스로도, 이게 최대의 이유였었지 싶은 것은, 뭐랄까, 그 당시에…여기서부터는 정말로 아무도 들은 적 없는 이야기라서, 이것참~


그 당시에, 내가 있지, 같이 SF대회나 스태프를 하던 아이랑 뭐 사귀고 있었다고 할까, 결혼까지 했었는데 바람을 피워버렸거든.


그래서 그 아이가 「저는 앞으로 어떻게 되나요. 오카다 씨는 부인도 있는데…」 이렇게 말해서 내가 「진정해 진정해」 이런 식으로, 그 상황만 모면해 왔거든.


(시청 코멘트를 보고서)「에에에에에」나 「최악이다w」……맞아 쓰레깁니다. 네, 죄송해요.


최악이니까 지금까지 말 못했던 거고, 하고 싶지도 않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지. 내 인의를 관철하는 수밖에는(웃음). 그래서 그 아이가 다른 스태프한테 상담을 해서 들키고, 나는 완전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규탄 당했어. 그런 짓을 해도 된다고 생각했냐, 는 말도 있었고 더는 너랑은 같이 못하겠다는 식의 말도 들어서. 내가 그 때 생각했던 게…


(시청자 코멘트를 보고서)「그런 녀석이라곤 생각도 못했다」「토시오한테 실망했다」 미안해(웃음) 「딸이 보고 있냐」 보고 있지 않다고 생각하지만 머지않아 보게 될 거라 생각해. 나도 말이지, 딸이 십년은 (나랑) 말 안 할 걸 각오하고서 말하는 거지만. 그래서 그 때는 말이지, 나 더는 오사카에는 있을 수 없겠구나 하고 생각한 건 사실이거든.


그게 말이지, 가이낙스 스타트의, 나에게 있어서 가장 큰 계기였어. 즉 지금까지 내 친척, 가족 이상의 존재였고, 평생 함께 해내갈 거라 생각했던 사람들 전원에게서 「널 경멸한다」「너 같은 놈이랑 같이 일할 수 없다」란 말을 듣고서, 반성하고 머리를 숙이며 「한 번 더 해주세요」라고 말할 만한 귀염성도 나한테는 없었던 거지.


그럴 게 아니라, 그럼 오사카에 있을 수 없으면 어떻게 해야 할까를 생각했어.


그 때, 비슷한 생각을 했던 것이 『오네아미스의 날개』의 감독인 야마가 히로유키 군이였고, 야마가는 야마가대로 「이대로 오사카에서 행복하게 있을까보냐」 생각했었어.


왜냐면 안노나 아카이는 그럭저럭 오사카에서 행복했었거든.


안노는 『돌아온 울트라맨』 도중에 감독에서 강판 당하긴 했어도 마지막까지 만들고, 다음은 뭘 만들까 생각하고 있었고.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같은 걸로 호출 받아 이따금씩 도쿄에 가서 애니메이터 작업을 하고, 다시 오사카에 돌아와 자주영화를 만드는, 굉장히 좋은 밸런스로 살았거든.


말하자면, 하카타를 본거지로 삼고 도쿄에 가서 돈을 버는 하카타 하나마루・다이키치(※개그맨) 같은 포지션이었지.


그리고 아카이 군은 아카이 군대로 특촬영화를 하고 싶어 했으니까, 그렇지만 도쿄에 가서 특촬영화를 한다고 말했더니 거대한 스튜디오 시스템 같은 영화업계 중 제일 아래에 들어가서 뭘 할 수 있겠냐고 했었지.


아메미야 케이타가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카와자키 미노루가 어떤 상황에 처했는지를 생각하면, 그런 곳에는 가고 싶지 않다는 식으로 아카이 군은 말했어.


역시 오사카에서 자주영화, 8미리를 했으니까 다음은 16미리, 그 다음은 35미리란 식으로 점점 스케일 업을 한다――아카이 군은 그런 의미로는 굉장한 전략가인 동시에 견실한 사람이니까, 그런 식으로 생각했어.


하지만 오직 야마가만, 이대로 오사카의 시골에서 자주영화로 굉장히 유명한 녀석이 되는 걸로 끝나는 건 싫다고 했지.


하지만, 이제 이 집단은 여기서 만족해버릴 대목에, 생각지도 못하게, 나한테 스캔들이 일어난 거지.


그래서 나는 나대로 「더는 오사카에는 못 있겠구나」라고 생각했고, 야마가 쪽은 야마가 대로 「오카다 씨, 오사카에 못 있겠으면 도쿄에 가죠」라고(웃음)


나는 그 당시, 야마가랑 같이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걸, 뭐랄까, 거의 도망치는 걸로 생각했었지.


하지만, 그래……백에 1이 아니야, 4대1, 3대1이나, 25퍼센트 정도의 승산은 있다고 보였어.


현재의 애니메이션 업계나, 우리가 지닌 것이나, 그리고 오사카에서 모든 신뢰를 잃었다곤 해도, 현재 내가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이나 영향력을 생각하고, 도쿄에 가서, 엄청 일해서, 엄청 대단한 사장이 되고, 굉장히 좋은 프로듀서가 된다면…성공률 25퍼센트일까, 약간 더 올라가지 않을까, 하고.


야마가는 야마가대로 「성공률이 설령 10퍼센트라도 나는 이제 갈 수 밖에 없다」고 말해줬어.


그럼 갈까 답하고, 오사카의 제네프로…였었지, 를 전부 버리고 갔었어. 그러니 당시의, 지금의 가이낙스를 이루는, 나랑 야마가 이외의 전원이지, 거의 전원이 가이낙스란 회사가 생길 거라곤 아무도 믿지 않았어.


나랑 야마가만 믿었어, 그보다는 야마가는 「성공 못하면 곤란하다」고 했고,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성공 못하면 돌아갈 곳이 없다」는 상황으로 도쿄에 가서, 고작 둘이서 시작한 거야.


그래서 좀처럼, 가이낙스가 커진 이후로도 오사카에서 사람을 부르지 못하지. 그렇게까지는 자신이 없었거든.


뭐랄까, S다 씨가 말이야 「아무도 모르는 가이낙스」라고 쓰고, 가이낙스가 어떻게 탄생했는지를 말해주세요라고 한다면, 나는 이 이야기를 할 수 밖에 없어.


그게, 이 이야기를 안 하면, 오사카에 단순히 굉장히 재능이 있는 사람들이 모여서 노력했습니다, 운도 따랐고 재능도 있었고 좋은 시대였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되어 버리잖아.


그렇지만 말이지, 오사카에 그 무렵 있던 것은, 나만해도…그 최악의 나만 해도, 야마가도, 안노도, 아마도, 이 방송을 보고 있는 너희들과 그리 다르지 않을 거야. 그렇게 다르지 않는 녀석들이 팍하고 시작해서, 이제부터 애니메이션을 만들자, 하고.


반다이에 프레젠테이션을 해서 3억엔이나 4억엔의 극장영화를 만들거라 말해도, 그 누구도 믿어주지 않았었지. 그러니까, 그다지 영웅담처럼 생각하지는 말아줬으면 하는 마음은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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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live.nicovideo.jp/watch/lv109074177




왜 그렇게 돈이 부족했나요 왜 한국에서 맡은 동화는 그렇게 수준이 낮았나요 이런 질문을 자주 받는데, 사다모토(나디아의 작화감독이었음.)랑 미팅을 할 거 아냐? 원화 수준이 굉장한 건 보면 알 수 있어. 그 다음이 동화를 그릴 차례라서 한국에 보내거든. 우편에 콘티랑 원화 레이아웃 배경을 담아 보내면 대체로 3주 후에는 우편이 돌아와


우편물을 확인할 때면 대체로 사다모토가 화를 내는 거야. 화만 내는데서 그치는게 아니라 그녀석 어쩔 땐 집에 가버릴 때가 있었다고. 바이크 타고 부웅~하고. 그래서 전화를 하면은 "어디를 고치면 되는 겁니까? 나디아가 어디에도 그려져 있지 않잖아요" 막 이러고 ㅋㅋㅋㅋ 해서 확인해 봤더니 닮은 듯 아닌 게 그려져 있어서 말이지 ㅋㅋㅋ


왜 이런 결과가 나왔냐면 기술의 차이가 아니라 인재를 어떻게 배치하는가 하는 국민성의 문제야. 일본 같으면 어려운 일에는 숙련공이 나서잖아? 어려우면 어려운 일일수록 실력있는 숙련자가 나와서 '뭐어? 이런 걸 어떻게 해!' 이렇게 투덜거리면서 뚝딱 해내잖아? 그러니까 똑같은 1만엔 짜리 작업이라도 손이 가는 내용이면 숙련자가 나서서 까딱하면 5~6만엔의 작업을 해버리는 그게 일본의 국민성이자 장인기질이기도 한거지.


근데 한국은 달라. 나디아는 어차피 한장에 120엔 짜리 일이거든. 120엔은 당시 한국으로서는 제법 대우가 좋은 편이었거든. 그러니까 '한장에 120엔이나 받을 수 있는 일감이다. 대박이야 대박!' 이러면서 파바박 일감을 받았는데, 정작 뚜껑을 열어보니 말도 안 되게 번거로운 내용이 오는거지.


'좀 더 참고자료를 주세요. 작화를 그려주세요' 이런 식으로 가이낙스에 연락을 하면 1주일 정도 지나서 토호 특촬 전집을 보내놓고 '이 안에 있는 알파호를 참고해서 그려주세요' 막 이러고 ㅋㅋㅋㅋ 한국인 입장에서는 요구가 엉터리라서 참고가 되질 않는 거야. 


저쪽은 어떤가 하면 제일 실력 있는 사람한테 가장 어려운 일감을 주지 않거든. 제일 실력이 있다는 건 제일 많이 벌 수 있다는 소리니까 간단한 작업을 파바박 끝내게 하는거야. 한장에 120엔 짜리 동화를 가장 실력 있는 사람은 하루에 100장은 끝낼 수 있거든. 그럼 일당이 1만 2천엔이 되는거지. 당시 한국이면 정말로 한달에 하나씩 새차를 살 수 있는 급료를 받는 셈이지.


그래서 어려운 작업이나 누구나 꺼리는 내용은 제일 초짜한테 돌려지는 거지. 따지고 보면 효율성이 좋으니까 나름의 정당성은 있지만 말하자면 장인을 키울 수 없다고 해야겠지. 실력이 좋은 사람은 금방 출세해서 경영자가 되어 현장을 이탈해 버리니까. 뭐랄까 문화를 가꾸기 힘든 한국의 국민성이라고 해야하나. 


어려운 장면이면 장면일수록 지독한 작화가 보내져 왔어. 보일 샤를의 법칙이라고 다들 기억해? 그거랑 마찬가지로 120엔의 작화가 난이도가 높으면 높을수록 작업의 정교함도 떨어지지 뭐야. 해결책은 단가를 올리거나 선을 줄여서 더 간단한 그림으로 만들 수 밖에 없는거지. 


근데 우리는 계속 일본 회사랑만 작업해 와서 장인에 의존하는 방식을 일본인적으로 이해하고 있었던지라, 한국과 일본의 차이를 몰랐던 거지. 한국인 입장에서는 양심적으로 '어느 부분은 힘을 빼고 해도 됩니까?'라고 물어 보는데 가이낙스는 '이 부분은 절대로 건성으로 하지마라' 이러니까 훨씬 심각해 지는거지.


때때로 국제 우편물 안에 라면이 들어있기도 한거야. 뭔가 싶었는데 일본인적인 배려로 라면을 넣어준거지. 우리들 입장에서는 그렇게 가난한 나라에서 간식을 받다니 ㅋㅋㅋ 이런 생각은 들지만 고맙게 받았거든. 근데 이웃 작화 스튜디오의 경험인데 상자를 열었더니 마약이 들어 있어가지고 ㅋㅋㅋㅋ 그래서 일시적으로 일본에 보내지는 작화 우편이 전부 스톱된 적이 있었어. 완전 쇼크였거든. 


그래서 우리도 '라면 안 줘도 괜찮으니까 아무것도 넣지 말아주세요!' 일본 업계 내에서는 유명한 일화인데 한국에는 안 알려진 모양이라 어리둥절 하더라고. 그렇다고 대놓고 마약 넣으면 난처하니까요 이럴수도 없는 노릇이고 ㅋㅋㅋ 


의사소통이 엇갈린 일례로 나디아는 흑인소녀지만 일본 애니메이션의 흑인은 그렇게 피부가 검지 않거든. 입술도 두껍지 않은 미소녀풍 캐릭터라고 설명을 해도 한국 작화 스튜디오는 미국이나 여러 외국의 하청도 하니까 흑인은 이렇게 그려야 한다는 상식 같은게 정해져 있는거지. 물론 일단은 사다모토가 그린 작화 지정표를 보내긴 하지만 그건 당연히 한두장 보내는 거거든. 일본의 상식으로는 당연히 현지에서 그걸 복사해서 스탭한테 돌리는 게 당연한건데, 한국은 메인 스튜디오 벽에 붙여놓고 나머지 사람한테는 말로만 전달하니까 때때로 완전 흑인 같은 나디아가 그려져 오기도 하는거야.


정 안 될 때는 국제전화로 연락을 취할 수 밖에 없었는데 1분에 1000엔 압박 ㄷㄷ해. 작화 한장에 120엔인데 미팅 1분에 1000엔이니 왜 우리가 한국에 하청을 주는건가 싶은거지. 그러니 항상 의사소통이 충분치 못했고.


왜 한국에 발주했냐고? 나디아 제작 전부터 정부가 결정한 문화교육이란 게 있어서, 한국에 문화적인 시연을 하는 거였슴. 교육방송인 nhk에서 1년에 몇개의 작품을 말하자면 인턴교육을 시켜 한국의 문화를 양성하는 취지였지. 어쩌다 나디아가 거기에 걸린 거였슴.


어쨌든 나디아를 제작하는 과정은 즐거워슴. 그 동경하던 미래소년 코난 시간대에 1년간 방영되는 아니메를 만드는 거니까 와꾸와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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