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트롱맨

뭔가의 번역물 2013. 3. 17. 15:24

박정희는 한국의 발전과 모순을, 특히나 대일관계로 체현한 인물이다. 조선반도 남동부, 경상북도의 농촌에서 태어난 박은 사범학교 졸업후에 소학교 교사가 되었는데, 군사교련 교관인 일본군인의 영향을 받아 혈서탄원 끝에 일본국적인채로 1924년에 만주국군의 군관학교, 나아가서 1944년에 일본의 육군 사관학교를 졸업했다. 창씨개명으로 <다카키 마사오>를 이름으로 댄 박은 1945년 소련군 만주침공에서도 만주국군의 중위로 참전하였는데, 일본 항복과 만주국 소멸로 인해 1946년에 조선으로 돌아갔다.


남조선에서는 미국 군정 아래 반일 반공 민족운동가인 이승만이 지휘하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독립준비를 추진하였고, 훗날 <친일파>라 규탄당하는 식민지 시대의 대일 협력자를 탄압하고 있었다. 심지어 공산주의자의 적발로 형이 경찰에 사살당하고, 박 본인도 한국군 내의 공산주의자로 사형을 선고 받았다.


하지만, 만주국군 시절의 인맥으로 구명되자 박의 운명은 호전되어, 독립 후인 1950년 6월에 시작된 한국전쟁에서도 활약을 해 미국 유학도 떠났다. 전쟁 중에는 육영수와 재혼을 하여, 1952년에 딸인 박근혜, 1958년에는 아들 박지만이 태어났다.


그리고 1961년 5·16 쿠데타로 추대되어, 1963년에 대통령이 된 박은, 형의 딸과 결혼한 김종필을 중앙정보부(KCIA) 부장으로 기용, 반정부 운동을 거세게 탄압했는데, 박정권을 경제면으로 지원한 게 일본이었다. 박은 이승만의 반일주의를 전환하여 1965년에 한일기본조약을 체결, 일본 정부로부터 일괄로 받은 식민지 지배의 보상금을 바탕으로 <한강의 기적>이라 불리우는 경제발전의 기초를 쌓았다. 또한, 박은 전 만주국 관료인 기시 노부스케의 신뢰를 얻어 자민당 내 매파와 친교를 돈독히 했다.


그러나, 박정권을 흔든 것도 일본이었다. 1973년에는 KCIA가 야당 정치가 김대중을 도쿄에서 서울로 납치한 <김대중 사건>, 1974년 8월 15일에는 식민지 지배에서 해방된 기념일로 연설중인 박을 재일 한국인 2세 문세광이 저격한 <문세광 사건>이 발생했다. 양국 관계의 악화를 저지코자 분주하게 뛰는 한편, 처의 사거(死去)로 낙심한 박에게 있어, 일본은 늘그막까지 우환거리였다. 그리고 박 자신도 KCIA 장관이자 동향의 후배, 김재규 손에 주연 도중에 암살당했다.


하지만 박의 영향은 개발독재형 군사정권의 계속으로써 남고, 민주화 후인 1997년에 대통령이 된 김대중도 김종필을 총리로 삼아 박에 의한 경제 발전의 성과를 칭찬했다. 박의 청렴결백함은 한국민의 향수를 자극해, 딸인 박근혜는 2012년에 보수계의 여당, 새누리당의 대통령 후보로 선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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