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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는 펭귄드럼』은『소녀혁명 우테나』이래의 이쿠하라 쿠니히코 감독 작품이었기에『우테나』를 무척 좋아하는 Parsley로서 기대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기대를 어긋나지 않는, 아니 그 이상의 명작이었다. 최종회는 10번이나 봤지만, 10번 울었습니다.

작품은, 피가 이어지지 않은 가족의 형태를 그려냄으로써, 쉐어 하우스 등의 의존감이 늘어난 현재와 링크되는 부분도 있고,「아이는 부모를 고를수 없다」는 사실을「운명」으로 잘라 말해도 되는 걸까, 란 옳고 그름에 관해서도 생각하게 만드는 애니메이션이었다.

개인적으로는, 아마 2010년대에 접어들어서 에누리 없이 가장 중요한 작품이라고 생각하는데,「생존전략」의 임팩트가 너무 앞질러간 바람에, 이쿠하라 월드의 해석다툼이 되어, 이 작품이 2011년에 태어난 의미가 등한시 되는 것 같다. 따라서, 여기서는 사회비평으로써의『펭귄드럼』이 어떤 기능을 하는지 적어두고자 한다.

■「1995년」과「2011」년을 직접 연결한『펭귄드럼』 

『펭귄드럼』에서는, 타카쿠라 칸바・쇼마 형제와「운명일기」의 소유자 오기노메 링고, 그리고 칸바의 진짜 쌍둥이 남매인 나츠메 마사코 4인이「핑포스」가 일으킨「세계를 정화한 날」, 지하철 테러 사건 당일인 1995년 3월 20일에 태어났다.

설명할 필요도 없이, 이 날은 오움 진리교의 지하철 사린 사건이 일어났다. 오움과 관련된 사실을 말하는 건 아직도 나이브하다. 실제로 2006년의「코토노하」소동처럼, 과거에 연류된 사실이 판명되는 것 만으로 넷 상에서 큰소동이 일어난다. 그런 점을 이쿠하라 감독이 어떻게 캔슬했는지는 후술하기로 하고,『펭귄드럼』의 세계관에선 2000년대의 현상을 오히려 무시하고 완성시킨 흔적이 있다.

예를들어 타카쿠라 가는 건축한지 40년정도 되어가는 낡은 집이고, 라면가게나 대중 목욕탕 같은 오기쿠보 부근의 묘사는, 그리움을 느끼게 하는 풍경이다.

한편, 지하철의 차내 광고는 디지털 사이니지 풍으로 표현되고, 등장인물들이 지닌 휴대전화는 전부 스마트폰.

반복해서 등장인물을 농락하는「1995년 3월 20일」그것이 2011년이 되어서도 변함없이 영향을 끼치고 있다. 즉 16년간, 거기에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이것은 현실세계 또한 마찬가지 아닐까.

흔히, 버블 붕괴 후의 90년대를「잃어버린 10년」이라고 하는데, 진정한 잃어버린 10년은 2000년대는 아닐까.

그래서, 이쿠하라 감독은 등장인물의 회상이란 수법을 택하여, 2000년대를 건너뛰고 90년대와 2011년을 직접 액세스 시킨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 그에게 있어 2000년대는「보잘 것 없는」시간이었을지도 모른다. 정치나 사회, 컬쳐, 발표된 작품군. 그러한 모든 것을 캔슬시켜 없었던 걸로 만드는 마법이,『펭귄드럼』에는 있는 것 같단 생각을 억누르지 못하겠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평론가는 이 작품을 도리어 보지 않은걸로 치부하는 것처럼 보인다.

 ■「혁명」에서「생존전략」으로

『우테나』에선,「세계를 혁명할 힘」을 부여한다는「장미의 신부」= 히메미야 안시를 둘러싸고, 텐죠 우테나를 포함한「듀얼리스트」가 결투를 하며 이야기가 전개됐다. 여기서「혁명」이란 실제로 사회를 바꾸는 종류의 것이 아니라, 내면이나 심상심리가 바뀌는 것, 더 자세히 말하면「어른이 되는」것을 이쿠하라 감독은 그렸다. 그리고 내면의 변화 후에는 보이는 세계도「혁명」후의 정경이 되었단 사실을 암시했다.

그리고,『펭귄드럼』에서「혁명」에 가까운 의미를 가진 것이「생존전략」이다.
난치병으로 여명이 얼마남지 않았다고 진단받은 타카쿠라 형제의 여동생・히마리를 구하기 위해, 형제는 프린세스 오브 크리스탈의 지시를 따라「펭귄드럼」을 찾게 된다. 이 부분의 설명을 시작하면 끝이 없으므로 생략.

주목할 부분은 90년대의 『우테나』는「세계를 바꾸는」것이 주인공의 목적이었지만, 2011년의『펭귄드럼』은「살아남는」것 자체가 목적이 된 사실이다.

즉 90년대는「혁명」할 여지가 사회에도 있었다. 그로부터 16년 경과한 지금의 사회에는「혁명」을 견딜수 있을 만큼의 여유가 없고, 또 실행하고자 하는 인간의 힘도 쇠퇴했다. 할 수 있는 건, 무슨 일이 있건 살아 남는 것...

설명할 필요도 없이, 연금의 급부연령은 올라가고, 사회 보험비의 증대나 재정파탄을 피하기 위해서 소비세 등 세금은 오르지 않을 수 없다. 종신고용제는 과거의 일이고, 그 누구나 실업할 가능성은 있다. 한번 라인에서 떨어지면 기어오르기도 쉽지 않다. 그런 상황에서 살아가며, 또 가능하다면「가족」을 얻는다. 그것이, 지금이 일본인 모두에게 요구되는「생존전략」은 아닐까.

■ 오움 진리교와「핑포스」의 차이

전술한 대로『펭귄드럼』은 지하철 사린 사건을 모티브로 삼았다. 단, 실제 오움 진리교와「핑포스」는 사건을 일으킨 동기가 전혀 다르다.

오움 진리교는 하르마게돈 사상과 교조 아사하라 쇼코의 자의식이나 다름없게 되어, 갖가지 사건을 일으킨 끝에 와해되고 있었다. 지하철에서 사린을 살포한 것은, 강제조사가 있다는 정보를 얻고서 교란이 목적이었다고 판명되었다.

한편「핑포스」는「세계를 파괴할 계획」을 실행하기 위핸 조직으로 종교단체라기 보다는 정치결사로 파악해야 한다. 그 대의는, 타카쿠라 삼남매의 부친・켄잔의 다음같은 발언이 나타내고 있다.

「이 순간에도, 많은 아이들이 투명해지고 있다. 그것을 방치하는 이 세계를, 용납해도 좋을리가 없다. 그렇기에, 우리들은 다가오는 성스러운 날에, 세계를 정화해야만 한다.」

                                                        (제 20화「선택해 주어서 고마워」에서
)

오움 진리교가 일으킨 갖가지 사건은, 교단의 이기적인 범죄였다는 합의가 이루어졌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어째서 이 교단이 생겨나 컬트화 되었는지. 그 시대적 배경에 관한 연구는 아직 진척이 없는 상태다. 오움에서 종교적 요소를 생략하고, 대의를 부여한 「핑포스」는, 역설적으로 그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어린이 브로일러」와 아동학대・소자화 문제

『펭귄드럼』의 스토리 안에서, 특히 흉흉한 것이「어린이 브로일러」의 존재다. 세계에서 버려진 아이들이 모여, 파쇄기(shredder)로 산산조각 나 투명한 존재가 되어 버린다. 

물론 이같은 시설은 실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현재의 일본 상황은 내밀한「어린이 브로일러」가 존재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 작품의 등장인물은 전부 과도할 정도로 부모나 가족의 프레셔로 고통 받고 있다.

링고가 죽은 언니 모모카가 되고자「프로젝트M」을 수행하는 것은 양친이 이혼을 해 가정이 붕괴되었기 때문이고, 그녀가 맺어지려 한 상대 타부키는 피아노에 대한 재능이 없다고 판단한 모친에게 버려져「어린이 브로일러」에 보내졌다. 타부키와 결혼하는 토키카고 유리는 조각가인 부친에게서 정신적, 육체적인 학대를 받았다. 나츠메 마사코는 과한「부성」의 소유자인 조부와 가족을 버리고「핑포스」에 들어간 부친의 상극에서 자랐다.

현실사회에 있어서, 아동 학대 상담건수는 후생 노동성에서 통계를 개시한 1990년에 1101건, 2010년에는 55152건으로 해마다 증가하고 있다. 학대가 근년들어 급증했다고 보이지만, 실제 학대수는 다르지 않다는 논쟁이 있으므로 수자를 그대로 맹신하는 것은 시비가 있겠지만, 경제상황이나 노동환경의 변화, 가족의 다양화 등으로 인해, 양육에 있어서의 액시던트가 발생하기 쉬워졌다는 건 분명하다.

그리고, 소자화가 진행되고 있는 것은 주지의 사실. 15세 이하의 아이 수는 30년 연속으로 감소하고 있다. 이는 역으로 말하면「아이를 바라지 않는 사회」로, 무의식적으로 이행하고 있단 뜻이다.

이렇게 생각해보면,「어린이 브로일러」는 상상의 산물이라 잘라 말하기엔 너무도 무거운 존재다. 우리들은 깨닫지도 못한 채로, 살아갈 가능성이 있었을지도 모를 생명을, 투명한 존재로 계속 만들어 왔을지도 모른다. 

■「분명 그 무엇도 되지 못할 너희들」에서「운명의 사람」으로

「생존전략」은, 타카쿠라 형제를 향해「분명 그 무엇도 되지 못할 너희들에게 고한다」란 말로 시작한다. 그러나 최종적으론,「핑포스」를 계승한「기가의 회」가 재차 세계를 파괴하기 위해 지하철에서 일으키려 한 테러를『펭귄드럼』을 찾아 나누는 것으로「운명의 환승」이 가능해져, 형제는 그 존재가 사라지게 됐지만 세계를 구하게 되었다.

서로를 모르는 관계로는, 저마다의 존재는「아무것도 아니다」. 하지만, 서로 지기(知己)가 됨으로써「운명」에 변화가 생길지도 모른다.

『펭귄드럼』에서는「죄도, 벌도, 서로 나누는 거야」란 인상적인 대사가 맨처음 등장한다.「쉐어」가 키워드로 자리잡은 현재인데,「물건」만이 아니라, 서로의「마음」도 공유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어쩌면 고뇌에서 해방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운명」은 불변의 것이 아닌「환승」이 가능하다란 소리는, 이쿠하라 감독의 더할 나위 없는 포지티브 메세지라고 생각한다. 나 역시 누군가의「운명의 사람」이고 싶다. 그리 생각하는 사람이 늘어남으로써, 사회는 보다 좋아지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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